그리스도인이 배려해야 할 것 (마 7:6-11)

(1)     구별을 해야 할 필요

(2)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

(3)     분변(discernment)의 필연성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 구별(Discriminate)을 해야 할 필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방법에 따라 우리가 무엇을 제시해야 하는가를 조심스럽게 점검한 필요를 가르치십니다. 만일 우리가 세속적인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시의 진주를 제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들의 발로 진주를 짓밟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발로 짓밟는 것이 아니라 – 그렇다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 그들은 그들의 발로 하나님의 진리를 짓밟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성령님만이 우리에게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가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진리 중에는 하나님께서 간단하게 하지 않으신 것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분명하게 가르친 것이 있다면 구원과 성화의 길입니다. 그 후 우리의 이해는 온전히 우리의 빛가운데서 걷는 것과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물을 탄 것처럼 묽게 해서 세속적인 것에 맞추어 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돼지의 발 아래 짓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아무튼 나는 지금 하나님의 진리를 더러운 돼지에게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개들, 곧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주지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하십시오. 당신의 거룩한 것을 그들 앞에 던지지도 마시고 하나님의 진리의 진주를 “돼지” 같은 사람들에게 주지 마십시오. 바울은 성화라는 진주가 음란이라는 진흙탕에 쳐 박힐 가능성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주님께서 강하게 경고하신 주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 속에서 깨달은 귀한 것들을 언제나 말할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 간의 친교 시에 이러한 진주와 같은 귀한 것들을 열어서 보여줄 필요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려는 수단으로 그러한 귀한 경험들을 과시할 때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옳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그들이 그들의 발로 그것들을 짓밟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주님 외에는 다른 것을 고백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마 10:32).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에 기초한 간증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하는 것은 언제나 옳지 않습니다. 그러한 간증들은 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간증은 우리 주 예수님이셔야 합니다. 주님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나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한 것보다 자신의 경험에 충실하기가 훨씬 더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간증한다고 하는 자들의 특별한 종교 개념을 때문입니다. 중심 진리는 복음도 아니고 성화도 아니고 재림도 아닙니다. 중심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요 12:32).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 중 어떤 것을 끄집어 내어 그것을 진리로 가르치면 언제나 오류가 따라오게 됩니다. 그것은 진리의 한 부분인데 만일 우리가 그 부분을 진리의 전부인 것으로 취하면 우리는 주님이신 예수님 그분 대신에 어떤 종교 개념을 옹호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개념(idea)의 특징은 개념은 한계를 설정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기독교 교리에만 충실하면 우리는 우리의 집을 “개념”이라는 큰 망치로 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의 하는 말을 들으면 “그렇군,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라고 말하지만, 표현되는 방법에 분개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주장하는 자세와 독단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께만 집중하는 모습이 들어오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 (마 7:7-10)

 

이 구절의 말하는 간단한 핵심은 모든 상황 가운데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으로 가득차게 해서 완전한 신뢰의 자세를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것과 그리스도의 마음을 형성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있는 자들을 향하여 행위의 규범들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생각으로 당신의 마음을 훈련시키십시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이 선상에서 훈련되면 당신이 어려움에 처할 때 마다 “그렇다.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아신다!”라고 쉽게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해 낼 것입니다. 이러한 기억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혼돈이 닥칠 때마다 당신은 이곳 저곳에 가서 묻고 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의식이 강력하게 당신 안에 있기 때문에 당신은 간단하게 그 상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주권 의식이 역사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으면 어려운 상황 가운데 우리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가에게 먼저 갑니까? 맨 처음에 무엇을 합니까? 누구를 가장 의지합니까? 마태복음 6:25-34절에서 말한 이치는 이러합니다. –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분이 나에 관한 그 어떤 것을 잊을 수가 없다. 따라서 왜 나는 걱정하는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강한 의식을 언제나 지키시고 모든 상황에서 주님의 다스리는 손길을 체험하시며 자라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가 담겨 있지 않은 일은 어떤 특별한 일들은 발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벽한 확신 가운데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에는 하나님께서 어두움을 제거하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하나님께서 불친절한 친구로 보일 때가 있지만 실제로는 아니며, 매우 자연스럽지 않은 아버지처럼 보일 때가 있어도 실제로는 아니며, 심지어 불의한 재판관으로 보일 때가 있어도 실제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설명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기도는 구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분위기를 만드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그가 구하는 모든 것을 삶을 통하여 얻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will)”가 없는 것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부귀를 구하면 그 사람은 부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기도는 그를 바보로 만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요 15:7). 우리는 마음에도 없는 것을 중얼거리며 기도한 후에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러한 경우는 우리가 아무 것도 구하지 않은 것입니다. 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의지가 우리가 구하는 것에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말하길, “나는 하나님께 나의 삶이 주님의 에덴 동산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오히려 슬픔의 쟁기를 쥐고 살게 되었습니다. 정원대신 광야가 주셨어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잘못된 답변을 주시지 않습니다. 분명히 당신의 삶의 정원이 땅을 갈아야만 하는 거친 땅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주님의 에덴 동산으로 바꾸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간섭하시는 것을 분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소위 바울이 말한 “자의적 숭배”(골 2:23)에 빠지기 쉽습니다. 의지는 한 사람의 전인격적인 활동입니다. 의지에는 엄청난 힘이 들어 있습니다. 순수하게자신의 의지만으로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은 영적으로 가장 다루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우리의 의지이지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의지였습니다. 죄는 인간에게 들어온 타락한 성향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는 의지가 있으며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과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의지는 온갖 종류의 욕구들과 동기들로 덮여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성령께서는 사람의 의지의 뿌리까지 내려가서 역사하십니다. 이때 의지는 매번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우리가 사람을 얻으려는 것도 그 사람의 의지를 바꾸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높이면 주님은 사람들의 의지를 주장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사람의 의지가 기도하고 싶은 방향으로 향한다면”이라고 결코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대신 어린아이와 같은 가장 간단한 마음 자세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 구하라. 우리가 이유를 대면서, “네. 그러나 ….”라고 하면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3) 분변의 필연성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그 하나님께 합당한 것들과 또한 주님의 영역에 합당한 것들을 간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점쟁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성품을 자라나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사정”은 그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아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듯이 “하나님의 사정은” 오직 영적으로만 분별될 수 있습니다 (참조, 고전 2:9-14).

 

여기서 분변이란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좋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순수한 주권적 은혜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습관적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이런 생각을 자신에게 해 보았는가? 나는 하나님의 것을 받기에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라고 하십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격이 되는 사람만 도와야 한다”는 저속하고 저주스럽고 인색한 이러한 의식은 사라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성령께서 그 마음 속에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누구냐?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구원을 너는 받을 자격이 있느냐? 성령으로 충만할 자격은 되는 것이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순수한 은혜에 의해서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8).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2). 이것은 한번에 끝까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 속에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습관입니다.

 

겸손과 거룩은 언제가 함께 갑니다. 나의 완고함과 거친 자세가 다른 사람을 향하여 나타날 때마다 나는 빛으로부터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엄중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조금도 희석되면 안됩니다. 그러나 당신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지금 당신이 어떤 자리에 서 있던 당신도 은혜에 의하여 구원받는 죄인이란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만일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득찬 곳에 서 있다면 이는 다른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동정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방치하셨다고 하나님을 종종 비난합니다. 말로는 이렇게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자세로 하나님께서 할 일을 잊고 계신다고 암시합니다. 이런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이런 생각이 당신의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오히려 일반적으로 성령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할 일을 방치하였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그 자리에 처하게 되었노라고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시작하십니다. 오늘날 가장 큰 유행은 사회주의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회 개혁자로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말도 안되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회 개혁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는 변화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주님께 던집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를 옳은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원칙대로 우리는 사회 개혁자가 됩니다. 이 원칙은 우리가 사는 그곳에서 즉각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에서, 친구, 고용주, 고용원의 관계에서 우리는 개혁을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대해 주셨는가를 고려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당신이 받은 대우대로 행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