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에 대한 교훈 (마 5:31-37)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연습이란 다른 사람이 보던 말던 나 스스로 계속 뭔가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습관은 연습의 결과입니다. - 계속적으로 뭔가를 하여 두번째 속성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차이는 개인적인 능력의 차이라기 보다는 어떤 사람은 훈련되어 있고 다른 사람은 훈련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생각하는 방법을 훈련한다면 우리는 정신적 능력 및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훈련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충동을 조심하십시오. 충동은 어린아이들의 특징이지 어른들의 특징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충동적인 사람은 전혀 훈련이 안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제어되지 않은 충동은 훈련되지 않은 힘입니다.

 

모든 습관은 거의 기계적입니다. 우리가 어떤 습관을 형성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뇌 성분에 변화를 줍니다. 뇌성분은 아주 천천히 바뀌는데, 계속적으로 뭔가가 반복될 때 뇌성분에 자국이 생기면서 그 반복되는 일이 점점 쉬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의식도 없이 그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에 의하여 그분의 생명과 어울리지 않는 모든 습관을 개혁할 수 있습니다. 이때 선한 습관을 만들려면 천천히 하시면 안됩니다. 당장 하시고, 분명하고 확실한 결단을 가지고 하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중도에 멈추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지도에 따라 습관을 형성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능력과 연습이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가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의 물리적인 부분이 그 선상에 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계속 연습하면 우리가 연습하는 것이 우리의 둘째 속성이 될 것입니다. 위기가 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본성도 함께 동참하여 그 위기를 이길 수 있게 합니다. 연습은 우리가 할 일이지 하나님이 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위기는 우리가 연습을 해 왔는지 아닌지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사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훈련 시켜야 하는 그 일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입니다.

 

31과 32절에서 예수님은 이혼에 대하여 언급하십니다. 결혼과 돈은 개인의 삶과 사회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들은 실체의 시금석이기 때문에 이 둘과 관련하여 성령께서 언제나 일하십니다. 결혼은 높은 산봉우리에서 하나님의 천둥 소리로 울려 퍼져 영혼들로 하여금 지옥을 체험케 하던지 또는 하나님의 빛이 사람의 삶을 영원한 천국을 체험할 수 있도록 변모시키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불의의 문제를 두려움이 없이 대하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도 두려움이 없이 대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주님께서 바르게 회복시킬 수 없는 어둡고 복잡한 상황이나 얽힌 인생이 없습니다. 성경은 갓난아이들과 어리석은 자들을 위하여 쓰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삶 속에서 천국의 요소들 뿐만 아니라 지옥의 요소들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표정은 그럴 듯 하지만 그 마음은 끔찍한 비극으로 가득한 삶들을 만질 수 없다면 주님의 구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주께서는 만지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성향을 바꾸실 수 있으시며 우리의 꿈들의 동기까지 바꾸셔서 더 이상 정욕이 그 꿈들 속에 머물지 않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1) 말과 진실 (33절)

 

진실이란 보이는 것과 실제가 정확하게 같은 것입니다. 당신이 사회의 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옳은 말만 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당신의 하늘 아버지께서 진실한 모든 것을 지지하실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을 지지하려고 할 때 사탄이 틈을 탑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지지해줄 증인을 부를 필요가 없어야 합니다. 우리 말로 충분해야 합니다. 사람이 우리는 믿던 말던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말에 신용이 있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고 지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인격과 삶이면 아주 충분한 것입니다. 당신의 말을 아끼시고 오직 당신의 말을 통하여 당신의 진심만을 알리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형성되기까지는 우리는 진실하지 않으며 정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주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주께는 우리를 우리 자신에 대하여 정직하게 만드시고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는 관용하며 친절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너무 쉽게 말만 잘하는 사람에게 덫이 있는데 바로 말로만 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진리를 잘 표현할 수 있다면 위험은 우리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경건하게 말은 합니다. 그런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대화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에 근거하여 나누게 되어 듣는 자들이 그 말에 의하여 세움을 입도록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꾸밈없는 진실함은 언제나 서로 세웁니다. 부패한 대화들은 우리를 비열하고 좁게 느끼도록 합니다. 사람 중에는 절대로 나쁜 말을 하지 않는데 그들의 영향력이 아주 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릇의 겉에 신경쓰지 마시고 그릇의 내면에 신경을 쓰십시오.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 부합하는 말을 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그러면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당신의 말과 진심이 하나가 될 것입니다.

 

(2) 망령된 종교적 상투어 (34-36절)

 

지금처럼 예수님 당시에도 자신들의 일반적인 주장을 지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금하셨습니다. 주께서는 당신이 말한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속한 그 어떤 것도 불러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진실은 하나님께도 진실인 것을 깨닫고 단순하고 진실하게 말하십시오. 당신이 말한 것을 지지하기 위하여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것은 언제나 당신이 말하는 것이 거의 사실이 아니라는 증표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당신이 말한 것이 진리이어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면 이는 당신이 말한 것이 자명한 진리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만일 자명한 진리라면 이를 증거할 이유들을 찾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실한 것들을 취하시며 이를 위한 다른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망령된 종교적 상투어, 곧 가장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말해야만 하는 것들을 경박스럽게 말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나는 놀라운 방법으로 구원을 얻은 어떤 인디안 여인을 기억합니다. 그녀는 아주 못생긴 여인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들으면 그녀의 얼굴이 변모되었습니다. 그 여인의 온 마음은 그녀의 주님이요 구세주를 향하여 깊은 존경과 사모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3) 신실함 (37절)

 

신실함이란 균형잡힌 청결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이 주께서 우리 안에 넣으신 성향의 정확한 표현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삶과 교훈을 통하여 그 누구도 자신의 영광을 위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영광을 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영광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7). 사람들은 주님을 먹을 것을 탐하는 사람, 술꾼, 정신병자, 귀신 들린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아버지의 영광을 깍아내리는 말을 하는 순간 주께서는 입을 여셔서 심한 말들을 하셨습니다 (참조, 막 11:15-18). 주의 성령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의 기준을 바꾸셨으며, 이에 주의 제자인 우리들도 사람들이 우리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던 신경 쓰지 않게 되었지만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하여는 엄청나게 신경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우리 자신의 영광이 아닌 우리 주님의 영광이 걸려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당신을 흥분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당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려주는 표시입니다.

 

당신은 당신에 대하여 떠도는 비방을 옷의 묻은 진흙처럼 다루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젖어 있는 동안에 해결하려고 하면 그 진흙은 옷에 다 묻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것이 마를 때까지 내버려 두면 당신은 툭하고 털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떠도는 비방을 절대로 건드리지 마시고 내버려 두십시오.

 

사람들이 당신의 진실에 관하여 원하는대로 생각하도록 두십시오. 절대로 설명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언제나 설명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내 버려두지 않음으로 계속 빠져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 어거스틴의 기도를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오 주님, 나를 언제나 변론하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은 제자들이 실수할 때에도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많은 큰 실수들을 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조용히 계속 진리를 심을 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 스스로 실수들을 고쳐나갈 수 있도록 내 버려 두셨습니다.

 

칭찬과 관련해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어떤 일을 잘 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아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한 것을 확신할 때는, 우리는 사람들이 칭찬하던 말던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사람들이 자신들은 두렵지 않다고 말할 때, 바로 그 때가 사실 그들이 두려워한다는 것을 증거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신실함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또 다른 진리는 우리의 생각이 우리가 말하는 것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멋지게 진실하게 말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그의 생각입니다. 사실 진실한 자세로 진실한 것을 말하면서도 그 생각 속에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나는 당신이 말한 것을 듣고 한 단어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반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말을 하면서 거짓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신이 그 말을 할 때 당신의 심기와 나의 심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거짓이란 말이 완벽하게 같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은 동기에 달려 있습니다. 곧 나는 사실적으로 말을 하면서도 거짓을 구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문자적인 단어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그들의 영향력입니다.

 

의심은 언제나 사탄에게 속한 것이며 이는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의 말을 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 점에서 의심은 “악한자로부터 온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자녀들을 의심하면서 그들이 말한 것에 대하여 매번 질문을 하여 확인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갈 경우, 자녀들은 자신이 말한 것을 변호하는 습관을 갖게 될 것입니다. “글쎄요, 저를 못 믿겠으면 그 친구에게 물어보세요.” 이러한 습관은 결코 저절로 어린아이에게 생기지 않습니다. 이러한 습관은 의심하는 부모가 계속적으로 “자, 나는 네게 말하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라고 말할 때 그들의 자녀에게만 발생합니다. 그 이유는 자녀들은 자신들이 한 말을 다른 사람이 지지해 주지 않으면 그가 말한 것을 진실로 인정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의 사람은 그가 말한 것을 지지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의심을 당하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모독이며 이러한 이유로 어린이들이 처음 어렸을 적부터 의심을 받는 것은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